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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부터 뭔가 스펙타클하고 황당무계한 꿈을 많이 꾸고는 했다. 아무리 짧게 십 분을 자고 일어날 때라도 꿈만큼은 외계인의 우주 침공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스케일도 크고 방대했다. 물론 거의 대다수가 개꿈이었지만 가끔, 나 스스로도 놀랄만큼 몽환적이거나 혹은 주제가 일관성 있거나, 서바이벌급으로 혹독하거나 하는 꿈도 있었다. 내용이 잔혹하고 꿈 속에서 내가 뛰어다니는 일이 많을수록 자고 일어나서 몸이 뻐근했지만 뭔가 곱씹을거리는 있었다.
찬바람이 부는가 했더니 벌써 피겨 시즌이 돌아왔다.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시즌이라 그런지 더욱 두근거리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한껏 부풀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떨리게 하는 것은 바로 남자 싱글, 통칭 '짜르(국적이 러시아라서)'라고 불리던 제냐(예브게니 플루셴코)의 복귀다. 연아 덕에 피겨계로 입문했던지라 내가 피겨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휴식기에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한창 활동하던 전성기때의 그를 실제로 보지는 못했고, 동영상으로나마 뒤늦게 접하면서 그 아름다운 경기들에 감동하며 아쉬워하곤 했었다. 아, 그때 나는 왜 피겨를 몰랐을까, 그 당시의 제냐를 생방송으로 보았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 남자 싱글의 매력에 한껏 빠지게 해 주고, 피겨의 동영상을 보고보고 또 돌려보는 재미에 빠져들게 만들어버린 장본인 제냐. 그런 그가, 4년의 공백을 접고 이번 시즌에 복귀했다.
그의 첫 경기 당일인 러시아 대회에서 나는 학교의 밤샘 책 읽기 행사 진행중이라 생방송으로 보지는 못했고, 나중에 집에 오자마자 그야말로 가방 던져놓고 찾아보았다. 제냐의 쇼트, 그 짧은 시간동안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정신없이 그의 몸놀림을 따라가고 있었다. 아, 이래서 그를 짜르라고 하는구나. 아, 황제가 복귀했구나. 내가 일생에 그의 경기를 실시간 시즌으로 즐기게 되다니. 물론 제냐의 이번 쇼트는 절대 최고라고 할 수 없다. 그의 전성기 시절과 비교하면 심심한 안무와 애매한 스텝, 세간에는 단순히 '점핑머신'이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쿼드를 팡팡 뛰어내는 점프만큼은 최고이지만 그 외에 아무것도 없어서 전혀 감흥이 없다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내가 경기에서 느낀 것은 그냥 잘한다, 못한다를 떠나서 '압도적인 존재감과 카리스마'였달까. 단순한 손짓 하나에도 그가 하면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경기장을 장악하는 그 뚜렷하고 강렬한 존재감, 자신감, 오만한 긍지, '이것이 진정한 챔피언이다' 라고 느껴지는 관록과 여유와 커리어,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이제껏 남자 스케이터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어떤 충만한 아우라가 그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 그래서 그를 짜르라고 하는구나. 프리와 갈라 프로그램까지 보고 나서 다시 한번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건 마치, 오만하고 무자비한 황제가 강림해서 양민을 학살하고 있는 느낌?; '압도적이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하게 깨달았다. 이번 시즌 연아가 그렇듯이. 연아를 두고 '플루셴코 이후 최고로 무자비한 선수'라는 말이 있었다는데, 그거야말로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한다. 이건 제냐가 경기장에 등장했을 때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느낌, 그 장악력, 다른 선수들은 안중에도 없게 만들어 버리는 그 카리스마를 직접 느끼면 바로 이해가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동영상으로 본 게 이정도면 실제로는 도대체 어떻다는 거야. 나이도 적지 않은 제냐가 한창 전성기 선수들의 의지를 이렇게 꺾어버려도 되는건가, 싶을 정도로. 항간에는 '금 많이 먹었다 그만해라'라는 농담도 있다는데, 워낙 제냐 본인이 컴페티션을 즐기는 사람이라 금이나 은, 메달색에 연연한다기보단 그저 경기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라 그게 또 좋다. 야구딘 은퇴 이후 라이벌이 전혀 없고 목적이 없기도 했지만, 복귀 소감도 '경쟁이 그리웠다' 라니, 정말 이 오만방자하고 긍지높은 짜르같으니라고. 그런거 치곤 너무 긴장감이 없어 보이고 심히 여유스러워보여서 얄미울 정도지만, 그런 모습이 바로 제냐다워서 좋다. 나는 그런 그를 그리워하지 않았던가. 아, 행복한 피겨의 계절, 나의 짜르가 돌아왔다. 얼마나 오만하고 긍지높은 자신감으로 그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줄지, 예전 '니진스키에의 헌정'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얼마나 가슴이 뭉클할 감동을 안겨줄지 기대되지만, 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여러번 거친 무릎수술을 생각해서 건강하고 재기발랄한 모습 그대로 남아주기를. 그 어떤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나의 영원한 짜르. 그가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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