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 망상이여

어릴적부터 뭔가 스펙타클하고 황당무계한 꿈을 많이 꾸고는 했다. 아무리 짧게 십 분을 자고 일어날 때라도 꿈만큼은 외계인의 우주 침공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스케일도 크고 방대했다. 물론 거의 대다수가 개꿈이었지만 가끔, 나 스스로도 놀랄만큼 몽환적이거나 혹은 주제가 일관성 있거나, 서바이벌급으로 혹독하거나 하는 꿈도 있었다. 내용이 잔혹하고 꿈 속에서 내가 뛰어다니는 일이 많을수록 자고 일어나서 몸이 뻐근했지만 뭔가 곱씹을거리는 있었다.

꿈 뿐이 아니었다. 멍 때리는 일이 잦거나 산만한 아이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공상하는 것 자체도 무척이나 좋아했다. 망상이라고 부를 법하게 영양도 없고 허황되기 짝이 없는 것이 대다수였지만 공상은 즐거웠다. 어릴 적부터 공상은 커다란 내 취미였다. 거의 베개가 머리에 닿으면 자는 편이지만, 간혹 잠이 늦게까지 오지 않을 경우 눈을 감고 즐거운 상상 속에 빠지곤 했다. 어린아이였던 시절의 공상은 그야말로 핑크빛 여자아이의 상상다웠다. 동화책에서나 읽던 기사나 공주님의 로맨틱한 이야기. 그 당시의 상상이란 내가 읽던 해피엔딩의 동화책에 국한되어 있었으므로, 한계는 거기까지였다. 초등학생과 중학생이 되면서부터는  내가 공주님이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에 좋아하던 책이나 게임, 만화, 애니메이션 등에 나오는 등장인물들 중심으로 공상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이계 소환 판타지는 꽤나 매력적인 소재였다. 학교와 시험과 숙제만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다른 어떤 신비스러운 힘이 가득한 세계. 그 곳에서 자신의 '공부'외의 다른 잠재력을 발견하는 주인공은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십 대 소녀의 공상의 활로를 열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혹은 아예 전형적인 RPG류는 지금도 그렇지만, 언제나 내 정신을 홀랑 앗아가는 장르였다. 특히나 푹 빠져있던 일본 RPG게임류 덕에 검과 마법 이야기만 나오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머릿속에서 등장인물을 움직이고 혹은 새로운 캐릭터를 집어넣기도 해서, 사건을 만들어 나가는 그 시간은 언제나 행복하고 소중했다. 너무 몰입해서 상상하다 소름이 돋거나 운 적도 있었지만, 그건 극히 드문 경우였고. 어쨌거나.

공상을 즐기던 소녀가 집을 나와 혼자 살게 되면서부터는 공상의 방에 현실의 물결이 넘어오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 제법 큰 즐거움을 차지하고 있던 공상의 빈도가 줄어들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었을 때는 꽤나 놀랐다. 연애를 하게 되면서는 늘 남자친구 생각을 하다 잠들기 바빴고, 그것이 아니면 과제나 레포트, 혹은 취업에 대한 고민, 학자금 통장 등으로 머릿속이 메워지고 있었다. 간간히 읽는 신화나 환상소설이 그나마 완전히 마르지 않은 공상의 샘을 간간히 적시고 있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흐르자, 이젠 소녀라고는 절대 할 수 없고 하지만 여인의 성숙함도 전혀 없는 애매한 과도기의 처자가 남아서 직장인으로 탈바꿈했다. 그러자 공상은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공상을 펼쳐나가는 건 고사하고 피곤해서 곯아 떨어지면 꿈조차 꾸지 않고 다음날 모닝콜 소리에 눈을 뜨는 일상. 꿈을 꾼 것이 언제였던가는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간혹 잠이 무지하게 오지 않는 밤. 어젯밤 잠이 오지 않아 한시간 동안 뒤척인 내 머릿속은 일, 아이들, 카드값에 대한 한숨, 앞으로의 미래에 대한 설계 혹은 불안 등등으로 가득했다. 그 어디에도 행복했던 달콤한 공상이 1%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걸 깨달은 순간 퍼뜩 놀라서, 이런거 잊어버리고 행복한 상상을 하고 싶어! 라고 생각하며 억지로 억지로 공상을 펼쳤으나 10초도 안 되어 원점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무너진 성채를 따라서 어두운 밤거리를 내달리는 여 기사단장, 그녀는 허리에 검을 꽂은 채 레지스탕스의 일원을 쫓고 있었다. 어두운 골목의 작고 지저분한 간판을 스쳐가는 그녀, 술집과 은행을 지났...아 그런데 내가 다음달 카드값이 얼마였더라? 하는 식.

결국 말라버린 공상과 동심에 대한 아쉬움, 안타까움이 일어나면서 한숨을 쉬다 눈이 점점 말똥해졌다. 억지로 되지도 않는 공상을 펼쳐보려던 노력은 그만두고 언제부터였나, 왜 이렇게 되었을까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이를 먹어서 그래'라는 답이 제일 먼저 생각났으나 비겁한 변명이라고 느껴졌다. 환갑이 넘는 나이에도 아름다운 상상의 나래를 펼쳐 전세계에서 사랑받는 작가들도 있잖아. 하긴 그러니까 전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거겠지만. '그 사람들은 상상이 밥줄이지만 넌 아니잖아? 쓸모없는 시간 낭비야.'라는 신랄한 답이 두 번째로 생각났다. 뭔가 그건 더 서러웠다. 필요하지 않으면 공상을 할 자유도 권리도 없는 건 아니잖아. 이건 내 머릿속의 양보할 수 없는 행복이라고. 계속 생각해 보았으나 시간이 없어서라는 건 정말 설득력 없는 변명이었고, 감성이 메말라서 그렇다는 건 스스로 인정하기에 서글펐다. 그렇게 계속 이유를 캐묻던 나는 어느 순간 잠에 빠져 있었다.

끝내 답을 내리지 못한 나의 고민을 위안이라도 하듯, 오랜만에 꾼 꿈에서는 내가 그토록 원했던 '말도 안 되는 허무맹랑한 세계'가 펼쳐졌다. 나였는지, 혹은 내가 이제까지 좋아해왔던 많은 작품들의 등장인물 중 하나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아무튼 꿈 속의 주인공은 오랜만에 달리고, 뛰고, 솟아오르며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놀랍도록 아름답고 비현실적인 탁 트인 들판에서.

결국 모닝콜 소리에 일어난다는 결말은 똑같았지만, 오랜만에 아침에 눈을 뜬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였다. 나는, 아직 괜찮은 것인지도 모른다.

by 피나 | 2009/11/26 10:25 | 파피루스 - 수다록 | 트랙백 | 덧글(2)
황제의 귀환
찬바람이 부는가 했더니 벌써 피겨 시즌이 돌아왔다. 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시즌이라 그런지 더욱 두근거리고 기대되는 마음으로 한껏 부풀어 있는데, 무엇보다도 나를 가장 떨리게 하는 것은 바로 남자 싱글, 통칭 '짜르(국적이 러시아라서)'라고 불리던 제냐(예브게니 플루셴코)의 복귀다. 연아 덕에 피겨계로 입문했던지라 내가 피겨에 눈을 떴을 때 그는 이미 휴식기에 들어가 있었다. 덕분에 한창 활동하던 전성기때의 그를 실제로 보지는 못했고, 동영상으로나마 뒤늦게 접하면서 그 아름다운 경기들에 감동하며 아쉬워하곤 했었다. 아, 그때 나는 왜 피겨를 몰랐을까, 그 당시의 제냐를 생방송으로 보았더라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하는 그런 아쉬움. 남자 싱글의 매력에 한껏 빠지게 해 주고, 피겨의 동영상을 보고보고 또 돌려보는 재미에 빠져들게 만들어버린 장본인 제냐. 그런 그가, 4년의 공백을 접고 이번 시즌에 복귀했다.

그의 첫 경기 당일인 러시아 대회에서 나는 학교의 밤샘 책 읽기 행사 진행중이라 생방송으로 보지는 못했고, 나중에 집에 오자마자 그야말로 가방 던져놓고 찾아보았다. 제냐의 쇼트, 그 짧은 시간동안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끼며 정신없이 그의 몸놀림을 따라가고 있었다. 아, 이래서 그를 짜르라고 하는구나. 아, 황제가 복귀했구나. 내가 일생에 그의 경기를 실시간 시즌으로 즐기게 되다니.

물론 제냐의 이번 쇼트는 절대 최고라고 할 수 없다. 그의 전성기 시절과 비교하면 심심한 안무와 애매한 스텝, 세간에는 단순히 '점핑머신'이라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쿼드를 팡팡 뛰어내는 점프만큼은 최고이지만 그 외에 아무것도 없어서 전혀 감흥이 없다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내가 경기에서 느낀 것은 그냥 잘한다, 못한다를 떠나서 '압도적인 존재감과 카리스마'였달까. 단순한 손짓 하나에도 그가 하면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경기장을 장악하는 그 뚜렷하고 강렬한 존재감, 자신감, 오만한 긍지, '이것이 진정한 챔피언이다' 라고 느껴지는 관록과 여유와 커리어,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이제껏 남자 스케이터들에게서 보지 못했던 어떤 충만한 아우라가 그를 완전히 감싸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 그래서 그를 짜르라고 하는구나. 프리와 갈라 프로그램까지 보고 나서 다시 한번 전율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이건 마치, 오만하고 무자비한 황제가 강림해서 양민을 학살하고 있는 느낌?; '압도적이다'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완전하게 깨달았다. 이번 시즌 연아가 그렇듯이.

연아를 두고 '플루셴코 이후 최고로 무자비한 선수'라는 말이 있었다는데, 그거야말로 최고의 찬사라고 생각한다. 이건 제냐가 경기장에 등장했을 때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느낌, 그 장악력, 다른 선수들은 안중에도 없게 만들어 버리는 그 카리스마를 직접 느끼면 바로 이해가 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동영상으로 본 게 이정도면 실제로는 도대체 어떻다는 거야. 나이도 적지 않은 제냐가 한창 전성기 선수들의 의지를 이렇게 꺾어버려도 되는건가, 싶을 정도로. 항간에는 '금 많이 먹었다 그만해라'라는 농담도 있다는데, 워낙 제냐 본인이 컴페티션을 즐기는 사람이라 금이나 은, 메달색에 연연한다기보단 그저 경기 자체를 즐기는 모습이라 그게 또 좋다. 야구딘 은퇴 이후 라이벌이 전혀 없고 목적이 없기도 했지만, 복귀 소감도 '경쟁이 그리웠다' 라니, 정말 이 오만방자하고 긍지높은 짜르같으니라고. 그런거 치곤 너무 긴장감이 없어 보이고 심히 여유스러워보여서 얄미울 정도지만, 그런 모습이 바로 제냐다워서 좋다. 나는 그런 그를 그리워하지 않았던가.

아, 행복한 피겨의 계절, 나의 짜르가 돌아왔다. 얼마나 오만하고 긍지높은 자신감으로 그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여줄지, 예전 '니진스키에의 헌정'을 처음 보았을 때처럼 얼마나 가슴이 뭉클할 감동을 안겨줄지 기대되지만, 다 그렇지 않더라도 그저 여러번 거친 무릎수술을 생각해서 건강하고 재기발랄한 모습 그대로 남아주기를. 그 어떤 모습을 보여주더라도 나의 영원한 짜르. 그가 복귀했다.
by 피나 | 2009/10/27 11:37 | 파피루스 - 수다록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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